권력은 왜 늘 피해자를 담보로 돈을 만들려 하는가

porcorosso

Hatched by porcorosso

Jul 31,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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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진짜 약자인가, 질문을 거꾸로 세워야 할 때

우리는 흔히 권력이 강자에게만 작동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은 더 기묘하다. 권력은 약자를 보호하는 척하면서 약자를 자산으로 바꾸려 한다. 보호, 복지, 연대, 회복 같은 말이 붙는 순간조차도, 그 뒤에서 누군가는 예산을 넓히고, 조직을 만들고, 자기 존재 이유를 증명한다.

여기서 가장 불편한 질문이 생긴다. 정말로 피해자를 돕는 제도는 왜 자주 피해자보다 제도를 운영하는 쪽에 더 유리하게 설계될까. 그리고 왜 개인의 상처와 집단의 고통은 그렇게 쉽게 정책의 재료가 될까.

이 질문은 문화 행정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여성의 자기서사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한쪽에서는 예술인을 위한 복지라는 이름으로 제도가 만들어지지만, 그 제도가 현장의 생활 안정보다 관료 조직의 확장을 먼저 떠받칠 수 있다. 다른 한쪽에서는 여성의 취약함을 말하면서도, 그 취약함이 어느새 전략, 이미지, 생존술로 포장되어 다시 개인에게 돌아온다. 둘 다 같은 구조를 드러낸다. 고통은 쉽게 자원화되지만, 그 고통을 겪는 사람의 삶은 끝내 주변으로 밀려난다.

가장 위험한 제도는 악의적이라서가 아니라, 선의의 언어로 자기 이익을 정당화할 때 나타난다.


복지라는 이름의 자산화, 연대라는 이름의 연출

제도는 늘 좋은 말로 출발한다. 예술인을 위한 공제, 여성의 연대, 약자의 회복, 공동체의 안전망. 문제는 그 말들이 구체적인 삶과 만나지 않을 때다. 그 순간 제도는 사람을 돕는 도구가 아니라, 사람을 매개로 스스로를 증식하는 장치가 된다.

예를 들어 보자. 생활이 불안정한 예술인을 돕기 위해 마련된 기금이 있다고 하자. 원래 목적은 단순하다. 불규칙한 소득, 작업 중단, 질병, 실업 같은 위험을 완충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 운영의 초점이 기금의 수혜자가 아니라 공제회 설계, 조직 신설, 관할권 확보, 관리 명분으로 이동하면 무엇이 남는가. 예술인을 위한 안전망이 아니라 예술인을 담보로 한 행정 자산이 남는다.

이때 권력은 노골적으로 약자를 해치지 않는다. 오히려 약자를 보호한다고 말하면서, 그들의 불안을 제도 설계의 연료로 사용한다. 복지는 생활을 안정시키는 장치가 아니라, 조직의 연속성과 예산의 정당성을 보증하는 장치가 된다. 이 구조는 아주 익숙하다. 병원을 더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병원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환자의 숫자가 필요해지는 것과 비슷하다. 환자는 치료의 대상이지만, 동시에 수익의 조건이 된다.

여기서 핵심은 목적성 자금의 도덕성이다. 목적이 분명한 돈은 누가 써도 선하다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목적이 분명할수록 그 돈을 둘러싼 권력은 더 정교해질 수 있다. “이 돈은 약자를 위한 것”이라는 문장이 붙는 순간, 그 돈의 사용 방식에 대한 질문은 쉽게 무례한 것으로 취급된다. 바로 그 지점에서 관료적 폭주는 시작된다. 질문하는 사람은 비협조적으로 보이고, 침묵하는 사람은 성숙하게 보인다.

복지의 언어는 흔히 권력을 숨긴다. 선의가 강할수록, 그 선의가 누구의 손에 의해 운영되는지를 더 집요하게 봐야 한다.


피해자의 언어가 왜 다시 권력의 연극이 되는가

여성의 경험을 둘러싼 현대적 담론도 비슷한 긴장 위에 놓여 있다. 한 개인이 상처를 입었을 때, 그 상처는 현실이다. 그러나 상처가 공적 언어가 되는 순간, 그 상처는 종종 서사의 형식으로 재포장된다. 피해자는 자신을 설명해야 하고, 설명은 늘 어느 정도의 연출을 요구한다. 분노는 너무 많으면 과장으로 보이고, 절제되면 진실성이 부족해 보인다. 상처는 있는 그대로 말하면 복잡하고, 잘 다듬으면 가공된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묻는다. 피해를 입은 사람이 쓸 수 있는 불쾌하지 않은 진실이 존재하는가. 이 질문은 단순히 윤리적이기만 하지 않다. 현실적이다. 왜냐하면 피해는 늘 자기 정당화의 유혹을 낳기 때문이다. 사람은 고통을 겪을수록 스스로를 강한 존재로 만들고 싶어진다. 무력했던 순간을 견디기 위해, 우리는 종종 자신을 용감한 인물로 재구성한다. 그런데 그 재구성이 반복되면, 어느 순간 진짜 감정은 사라지고 태도만 남는다. 피해자는 생존자가 되고, 생존자는 상징이 되고, 상징은 다시 소비된다.

이때 발생하는 역설이 있다. 자기 비하 없이 솔직하기가 왜 이렇게 어려운가. 이유는 간단하다. 솔직함은 취약함을 드러내고, 취약함은 곧바로 이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두 극단 중 하나를 택한다. 하나는 과장된 자기연출이다. 다른 하나는 냉소적 자기 삭제다. 전자는 힘 있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인정 욕구에 매여 있고, 후자는 안전해 보이지만 삶의 밀도를 잃는다.

이 두 극단은 사실 같은 구조에서 나온다. 상처를 말할 때조차 우리는 평가받는 무대 위에 서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진실을 말하는 동시에, 진실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계산해야 한다. 공공 제도도 마찬가지다. 약자를 돕는다는 명분 아래, 실제로는 어떻게 보일지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연대의 언어와 복지의 언어는 서로 다른 영역처럼 보이지만, 둘 다 이미지 정치에 쉽게 포획된다.

가령 어떤 조직이 여성 안전을 말하면서 실질적인 보호 조치보다 캠페인 포스터와 행사 사진에 더 공을 들인다면, 그것은 피해를 다루는 방식이 아니라 피해를 전시하는 방식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행정이 예술가 지원을 말하면서 정작 가장 불안정한 예술 노동의 조건, 즉 수입의 불규칙성, 사회보험의 부재, 경력 단절의 위험에는 손대지 않는다면, 그것은 지원이 아니라 관리다.


진짜 힘은 서사를 예쁘게 만드는 데서 오지 않는다

두 문제를 하나로 묶는 핵심은 이것이다. 진짜 힘은 고통을 보기 좋게 포장하는 능력이 아니라, 고통을 자원으로 바꾸지 않는 능력에서 나온다.

이 문장을 이해하려면 힘에 대한 오래된 환상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흔히 힘을 소유의 문제로 생각한다. 예산을 쥔 사람, 목소리가 큰 사람, 조직을 가진 사람, 발언권을 독점한 사람이 강자라고 믿는다. 그러나 더 깊은 수준에서 보면, 힘은 무엇을 획득하느냐보다 무엇을 획득하지 않기로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다. 피해를 실적화하지 않는 것, 불안을 조직의 정당성으로 삼지 않는 것, 연대를 브랜드로 포장하지 않는 것. 이런 절제야말로 희귀한 힘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관료제의 폭주와 자기서사의 연출은 같은 병리의 두 얼굴이다. 둘 다 불안을 다룬다. 다만 하나는 제도적 불안을 예산과 조직으로 바꾸고, 다른 하나는 개인적 불안을 정체성과 이야기로 바꾼다. 전자는 공적 장에서, 후자는 사적 장에서 벌어지지만 구조는 닮았다.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진 형식이 어느 순간 살아남기 위해 계속 유지되는 목적 그 자체가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순수성의 추구가 아니다. 아무도 완전히 순수할 수는 없다. 문제는 자기 정당화의 정도다. 제도는 자기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대상 집단을 필요로 하고, 개인은 자기 존엄을 지키기 위해 자기 서사를 필요로 한다. 둘 다 필연적이다. 그러나 그 필연성이 타인을 소모시키는 방식으로 굳어질 때, 복지와 해방은 각각 관료주의와 연극으로 변한다.

좋은 제도와 좋은 서사의 공통점은 화려함이 아니라 잔인함을 줄이는 능력이다.

이제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우리는 약자를 도울 수 있는가가 아니라, 도움의 형식이 약자를 다시 도구로 만들지 않게 할 수 있는가다. 그리고 개인에게는, 상처를 말하되 상처를 자산으로 바꾸는 서사 경쟁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는가다.


새로운 기준: 사람을 남기는 제도, 사람을 소모하지 않는 진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감동도, 더 많은 분노도 아니다. 필요한 것은 검증 가능한 기준이다. 제도가 사람을 위해 작동하는지, 서사가 사람을 살리는지 판단하는 기준 말이다.

첫째, 대상보다 운영자가 먼저 커지는가를 봐야 한다. 복지나 연대의 이름을 단 조직이 실질 수혜자보다 먼저 제도 생존을 고민한다면 경고등이 켜진 것이다. 회의, 위원회, 기구, 브랜드가 늘어날수록 현장의 삶은 더 나아지는가. 아니면 더 복잡한 서류와 더 많은 설명을 요구받는가.

둘째, 고통이 설계의 출발점인지 홍보의 재료인지 따져야 한다. 진짜 지원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람의 시간을 덜 빼앗는다. 반면 보여주기식 지원은 항상 사진이 남고 행사 기록이 남는다. 현장은 그대로인데 기록만 풍성해진다면, 그것은 해결이 아니라 연출이다.

셋째, 개인 서사에 대해서는 강함의 강박을 의심해야 한다. 상처 입은 사람이 반드시 용감하거나, 날카롭거나, 서사적으로 승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 가장 정직한 태도는 “나는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한 문장은 미완성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허세를 덜어낸다. 그리고 허세가 줄어들수록 타인과의 관계는 더 정확해진다.

넷째, 불쾌하지 않은 진실을 찾기보다, 불편해도 필요한 진실을 말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상처는 아름답지 않다. 제도는 완벽하지 않다. 그러나 둘 다 솔직함을 통해서만 개선될 수 있다. 아름다워 보이려는 순간, 우리는 개선보다 소비를 택하게 된다.

이 기준들을 종합하면 하나의 원칙이 나온다. 사람을 살리는 구조는 사람에게 설명을 더 많이 요구하지 않는다. 사람을 소모하는 구조는 언제나 더 많은 설명, 더 많은 감정노동, 더 많은 충성을 요구한다.


Key Takeaways

  1. 복지의 언어를 들을 때는 항상 운영 구조를 함께 보라. 누구를 돕는다고 말하는지보다, 누가 조직을 키우고 누가 책임을 지지 않는지 확인해야 한다.

  2. 상처를 서사로 바꾸는 순간, 그 서사가 누구를 이롭게 하는지 점검하라. 진실을 말하는 것과 진실을 상품처럼 구성하는 것은 다르다.

  3. 강함을 과시하는 태도보다, 고통을 자원화하지 않는 절제가 더 희귀한 힘이다. 제도든 개인이든, 불안을 이용해 자기 존재를 증명하려는 순간 왜곡이 시작된다.

  4. 보여주기식 연대와 실제적 지원을 구분하라. 행사와 캠페인은 눈에 띄지만, 시간 절약, 비용 감소, 안전 보장은 눈에 덜 띈다.

  5. 자신에게도 같은 질문을 적용하라. 나는 지금 솔직한가, 아니면 인정받기 위해 내 상처를 잘 포장하고 있는가.


결론: 약자를 지키는 일은 결국 약자를 쓰지 않는 일이다

우리는 종종 더 좋은 제도, 더 나은 담론, 더 감동적인 서사를 원한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훨씬 단순하고 불편한 윤리다. 사람을 위한 구조는 그 사람의 취약함을 먹고 자라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사람을 위한 진실은 그 사람의 상처를 공연처럼 전시하지 않아야 한다.

이 통찰을 받아들이면 풍경이 달라진다. 복지 정책은 예산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습관으로 보이기 시작하고, 개인의 자기서사는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 전략의 윤리로 보이기 시작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하나다. 우리는 누군가를 돕는다는 명분으로 그 사람을 다시 도구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약자를 보호하는 사회란 약자를 많이 말하는 사회가 아니다. 약자를 더 이상 담보로 삼지 않아도 되는 사회다. 그리고 더 성숙한 개인이란 상처를 가장 그럴듯하게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상처를 소비 가능한 형태로 바꾸지 않고도 자기 존엄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다.

그때 비로소 복지와 진실은 같은 방향을 가리키게 된다.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모든 언어는, 결국 사람을 남겨야 한다.

Sour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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