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시에 떠나고 평상시에 싸우는 조직은 왜 주민을 잃는가
Hatched by a010장인영
Aug 23,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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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이 멈춘 순간, 행정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주민의 삶이 가장 위험해지는 순간은 반드시 재난이 닥칠 때만이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재난의 시간표와 행정의 시간표가 어긋날 때 위험은 비로소 현실이 된다.
기록적인 폭우로 주민들이 고립과 생존의 위협에 놓인 상황에서 지방 행정 책임자가 해외연수에 참여했다는 논란이 불거졌다. 한편 다른 지역에서는 군청과 군의회가 301억 원, 133개 사업을 둘러싸고 정면충돌했다. 고령자 복지주택과 전통시장 재개발처럼 주민의 일상에 직접 연결된 사업도 예산 조정의 대상이 되었다.
겉으로 보면 두 사건은 서로 다른 종류의 문제처럼 보인다. 하나는 재난 대응과 공직자의 자세에 관한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예산 심의와 정치적 갈등에 관한 문제다. 그러나 둘을 한 문장으로 연결하면 전혀 다른 구조가 드러난다.
주민의 필요가 가장 절실해지는 순간에도 행정 시스템이 주민의 시간에 맞춰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행정의 실패는 언제나 무능력의 형태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때로는 책임자가 자리를 비우는 모습으로, 때로는 예산이 멈추는 모습으로, 때로는 서로를 설득해야 할 기관들이 상대를 무력화하려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공통점은 하나다. 주민이 실제로 겪는 시간의 압박이 의사결정 구조 안에서 사라진다는 것이다.
행정에는 두 개의 시계가 있다
모든 조직에는 적어도 두 개의 시계가 있다. 하나는 현실의 시계다. 비가 얼마나 빨리 불어나는지, 고령자가 언제 집을 떠나야 하는지, 시장 상인이 언제 매출과 생계를 잃는지 보여주는 시계다. 다른 하나는 조직의 시계다. 결재, 회의, 심의, 소송, 정치적 협상과 같은 절차가 흘러가는 속도를 말한다.
정상적인 행정은 두 시계를 최대한 가깝게 맞춘다. 산사태 위험이 커지면 대피 명령과 현장 확인이 즉시 이뤄져야 한다. 복지주택이 필요하다면 대상자의 고령화 속도와 주거 불안을 예산 심의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 반대로 두 시계가 벌어지면 조직은 겉으로는 작동하는 것처럼 보여도 주민에게는 멈춘 기관이 된다.
폭우 속 해외연수 논란은 이 간극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연수 자체가 언제나 잘못이라는 뜻은 아니다. 공무원의 학습과 교류는 장기적으로 행정 역량을 높일 수 있다. 그러나 재난 경보와 주민 고립이라는 현실의 시계가 빠르게 움직이는 동안 책임자의 위치와 대응 체계가 불분명했다면, 문제는 여행의 도덕성만이 아니다. 위기 상황에서 누가 판단하고, 누가 현장을 지휘하며, 누가 주민에게 설명하는가라는 시스템 설계의 문제다.
예산 갈등도 같은 방식으로 볼 수 있다. 301억 원을 삭감한 행위가 무조건 옳거나 그르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사업의 실효성이 낮거나 절차가 충분하지 않았다면 의회가 제동을 걸 수 있다. 반대로 복지와 지역경제에 필요한 사업을 정치적 갈등 때문에 일괄적으로 멈췄다면 그것 역시 주민에게 비용을 전가하는 결정이다.
핵심은 삭감액의 크기만이 아니다. 예산이 왜 멈췄는지 주민이 이해할 수 있는가, 무엇이 우선순위에서 밀렸는지 공개되었는가, 중단으로 발생할 손실을 누가 계산했는가가 더 중요하다. 조직의 시계가 현실의 시계를 압도하면, 예산 심의는 주민의 삶을 조정하는 과정이 아니라 기관 간 힘겨루기의 도구가 된다.
행정의 속도는 업무량으로 측정되지 않는다. 주민의 긴급함에 얼마나 정확히 맞춰 움직였는지로 측정된다.
책임은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재난이 발생했을 때 사람들은 흔히 책임자의 현장 출석 여부에 주목한다. 이는 단순한 이미지 문제가 아니다. 책임자가 현장에 있다는 것은 정보가 위로 올라가고, 결정이 아래로 내려오는 연결망이 살아 있다는 신호다. 반대로 책임자가 보이지 않고 대체 지휘 체계도 설명되지 않으면 주민은 두 가지 불안을 동시에 느낀다. 실제 위험에 대한 불안과, 아무도 자신을 책임지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이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은 책임의 연속성이다. 책임의 연속성이란 특정 인물이 반드시 모든 현장에 있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책임자가 자리를 비울 때 누가 권한을 이어받는지,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는지, 주민에게 어떻게 알리는지가 끊김 없이 작동하는 상태를 뜻한다.
예를 들어 소방서장이 현장에 직접 가지 못하더라도 부서장에게 지휘권이 명확히 위임되어 있고, 주민 대피 기준과 연락 체계가 사전에 공개되어 있다면 조직은 책임을 유지할 수 있다. 반면 책임자가 현장에 있더라도 보고가 늦고 지시가 모호하며 서로 책임을 미룬다면 물리적 출석은 행정적 책임을 대신하지 못한다.
이 관점은 지방자치의 일상에도 적용된다. 군수와 군의회가 서로 다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집행부는 지역경제와 사업의 연속성을 강조할 수 있고, 의회는 절차와 성과를 따질 수 있다. 민주주의에서 이견은 결함이 아니라 정상적인 장치다. 문제는 이견이 검증 가능한 공개 논리로 표현되지 않고, 상대 기관을 압박하는 정치적 신호로 변할 때 발생한다.
사업 하나를 두고도 주민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권리가 있다.
- 이 사업은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는가.
- 지금 시행하지 않으면 어떤 비용이 발생하는가.
- 사업을 줄이거나 늦출 경우 누가 가장 큰 영향을 받는가.
- 성과를 어떤 지표로 언제 검증할 것인가.
- 실패했을 때 누가 수정하고 책임질 것인가.
이 질문에 집행부와 의회가 각자 답하지 못한다면, 예산 논쟁은 정책 경쟁이 아니라 권한 경쟁이 된다. 복지주택 전액 삭감이나 시장 재개발 중단이 필요한지 여부는 각각의 사업 자료를 보고 판단해야 한다. 그러나 주민이 판단에 필요한 자료를 받지 못한 채 양쪽의 선언만 듣게 된다면, 예산은 공공의 선택이 아니라 불투명한 거래처럼 느껴진다.
예산은 숫자 목록이 아니라 주민의 대기 시간이다
예산서를 숫자의 목록으로만 읽으면 301억 원은 단순히 전체 예산의 일정 비율처럼 보인다. 하지만 주민의 관점에서 예산은 기다림의 시간과 위험의 분배표다.
고령자 복지주택 예산이 삭감되면 누군가는 더 오래 열악한 집에서 기다려야 한다. 시장 재개발이 지연되면 상인은 더 낡은 시설과 감소하는 유동인구를 견뎌야 한다. 귀농귀촌 단지나 관광 사업이 중단되면 지역의 미래를 위해 준비하던 사람들의 계획이 흔들릴 수 있다. 반대로 타당성이 부족한 사업이 계속되면 한정된 재원이 묶이고, 더 긴급한 사업의 기회비용이 커진다.
따라서 좋은 예산 심의는 찬성과 반대의 숫자를 세는 일이 아니다. 누구의 시간을 늘리고 누구의 위험을 줄이는지 계산하는 일이다.
이때 유용한 기준이 있다. 모든 사업을 다음 네 가지 질문으로 분류하는 것이다.
첫째, 지연 비용
사업을 6개월 미루면 어떤 손실이 발생하는가. 법적 손실, 물가 상승, 시설 노후화, 주민 이탈, 건강 악화처럼 구체적인 비용으로 표현해야 한다.
둘째, 실패 비용
사업을 지금 추진했다가 성과가 낮으면 얼마를 잃는가. 실패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모두 중단해서는 안 되지만, 실패를 측정할 기준이 없다면 추진 역시 정당화하기 어렵다.
셋째, 대체 가능성
같은 문제를 더 저렴하거나 빠른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가. 대규모 시설 대신 임시 주거 지원, 전면 재개발 대신 단계적 개선처럼 대안을 비교해야 한다.
넷째, 취약성 집중도
사업의 지연이나 중단으로 가장 크게 피해를 보는 사람은 누구인가. 평균적인 주민이 아니라 이동이 어려운 고령자, 생계 기반이 약한 상인, 재난 취약 지역 주민에게 영향이 집중되는지 살펴야 한다.
이 네 가지 기준은 예산 논쟁을 정치적 구호에서 정책적 판단으로 옮겨 놓는다. 집행부는 사업의 필요성만 주장할 것이 아니라 지연 비용과 실패 비용을 함께 제출해야 한다. 의회는 삭감의 명분만 제시할 것이 아니라 그 결정으로 발생하는 주민의 대기 시간과 대체 방안도 설명해야 한다.
예산을 줄이는 것은 비용을 없애는 일이 아니다. 비용을 다른 사람의 삶과 미래로 옮기는 일일 수 있다.
신뢰는 위기 때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저축하는 것이다
재난 대응과 예산 갈등을 연결하는 더 깊은 축은 신뢰의 저축과 인출이다. 주민은 평소에 행정의 모든 결정을 자세히 검증하지 않는다. 대신 몇 가지 경험을 바탕으로 위기 때 판단한다. 공무원이 평소에 현장을 찾았는가. 사업 선정 과정이 투명했는가. 잘못된 결정에 대해 설명하고 수정했는가. 기관들이 서로 싸우더라도 주민에게 필요한 정보는 제때 공개했는가.
이런 경험은 신뢰라는 보이지 않는 자산으로 축적된다. 신뢰가 충분하면 위기 때 다소 불완전한 결정이 내려져도 주민은 일단 협조할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신뢰가 낮으면 올바른 결정조차 의심받는다. 대피 안내가 정치적 책임 회피로 보이고, 예산 삭감이 재정 건전성이 아니라 보복으로 해석된다.
신뢰에는 특히 세 가지 요소가 있다.
예측 가능성은 행정이 기준에 따라 움직인다는 믿음이다. 평소에는 현장 대응을 강조하다가 실제 재난 때 지휘 체계가 보이지 않으면 예측 가능성이 무너진다.
설명 가능성은 결정의 이유를 시민이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사업을 추진하든 삭감하든 자료와 근거가 공개되어야 한다.
수정 가능성은 잘못이 발생했을 때 방향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다. 사업을 한 번 승인했다고 끝까지 밀어붙이거나, 한 번 삭감했다고 재검토를 거부하는 조직은 학습하지 못한다.
이 세 요소를 합치면 좋은 행정은 완벽한 행정이 아니라 오류를 드러내고 신속하게 수정하는 행정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재난 중 해외연수 논란에서 필요한 것도 단순한 비난이나 사과의 수사가 아니다. 당시 지휘 체계가 어떻게 작동했는지, 어떤 판단이 누락되었는지, 다음에는 어떤 자동 발동 기준을 둘 것인지가 공개되어야 한다.
예산 충돌에서도 필요한 것은 누가 이겼는지의 발표가 아니다. 삭감된 133개 사업을 위험도와 시급성에 따라 재분류하고, 주민 영향 평가를 거쳐 재논의할 수 있는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 정치적 갈등이 사라지지 않더라도, 갈등이 주민에게 불투명한 손실로 전환되지 않게 만드는 장치가 필요하다.
지방행정을 다시 설계하는 세 가지 원칙
첫 번째 원칙은 비상 기준을 평소에 숫자로 정하는 것이다. 기록적 강우, 하천 수위, 도로 통제, 대피 인원처럼 재난 단계별로 책임자의 현장 복귀와 상황 보고를 자동화해야 한다. 누구의 판단에 따라 움직이는지 불분명하면, 위기 때마다 도덕성 논란과 책임 공방이 반복된다.
두 번째 원칙은 예산을 일괄 삭감하거나 일괄 방어하지 않는 것이다. 사업마다 지연 비용, 실패 비용, 대체 가능성, 취약성 집중도를 공개하고, 필요하다면 전액 추진과 전액 삭감 사이에 단계적 집행이라는 선택지를 둬야 한다. 예를 들어 복지주택은 설계와 대상자 선정부터 시작하고, 시장 사업은 안전 개선과 상권 회복 프로그램을 먼저 시행하는 방식이 가능하다.
세 번째 원칙은 기관 간 갈등을 공개된 공동 검증으로 바꾸는 것이다. 군청과 의회가 서로의 진정성을 의심할수록 주민과 전문가가 확인할 수 있는 자료를 더 많이 내놓아야 한다. 공개 토론, 사업별 성과표, 분기별 점검, 주민 영향 보고서를 통해 갈등의 초점을 인물과 감정에서 사실과 결과로 옮겨야 한다.
이 원칙들은 거창한 개혁보다 작게 시작할 수 있다. 다음 회의부터 모든 주요 사업에 한 장짜리 주민 영향표를 붙이는 것, 재난 시 대체 지휘자를 공개하는 것, 삭감 사업마다 지연 비용을 기록하는 것만으로도 조직의 의사결정 방식은 달라진다.
Key Takeaways
- 긴급성의 기준을 미리 정하라. 재난 수준과 대응 책임, 보고 주기를 수치와 절차로 명문화하면 책임 공백을 줄일 수 있다.
- 예산을 주민의 대기 시간으로 읽어라. 금액뿐 아니라 사업 지연으로 누가 얼마나 오래 위험과 불편을 감당하는지 계산하라.
- 삭감에는 대안을 붙여라. 사업을 줄이거나 중단할 때는 대체 수단, 재검토 시점, 주민 피해 완화책을 함께 제시하라.
- 갈등을 숨기지 말고 검증 가능하게 만들어라. 집행부와 의회 모두 근거 자료, 성과 기준, 실패 시 수정 절차를 공개해야 한다.
- 신뢰를 평소에 저축하라. 현장 소통, 일관된 기준, 오류 인정과 수정이 위기 때 행정 명령의 효력을 결정한다.
재난 속에서 책임자가 자리를 비운 일과 예산을 둘러싼 기관 간 충돌은 서로 다른 사건처럼 보인다. 그러나 주민이 체감하는 결과는 비슷할 수 있다. 내가 위험에 처했을 때 행정이 나를 향해 움직이는가, 아니면 조직 내부의 일정과 갈등이 나보다 앞서는가 하는 질문이다.
지방자치의 품질은 평온한 날에 얼마나 많은 사업을 발표했는지로 결정되지 않는다. 비가 가장 많이 올 때 누가 주민의 편에 서서 즉시 판단하는지, 의견이 가장 크게 충돌할 때 누구의 기다림과 위험을 먼저 계산하는지로 결정된다.
결국 좋은 행정은 모든 갈등을 없애는 행정이 아니다. 갈등이 있어도 주민의 시간이 멈추지 않게 하는 행정이다. 기관이 떠나도 책임의 연결망이 끊기지 않고, 예산이 삭감되어도 대안과 재검토의 길이 닫히지 않으며, 잘못된 판단이 드러나도 수정할 수 있어야 한다.
주민은 행정이 언제나 옳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위기의 순간에 자신들의 삶이 조직의 편의보다 먼저 고려되고 있다는 확신을 요구한다. 그 확신이 사라지는 순간, 행정은 건물과 직함만 남은 시스템이 된다.
Sour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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