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을 든 정치와 잘린 예산 사이: 재난이 드러내는 행정의 진짜 책임
Hatched by a010장인영
Sep 06,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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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 현장에 직접 들어가 냉장고를 꺼내고 아스콘을 치우는 정치인은 박수를 받는다. 반면 예산 심의 자리에 담당 공무원이 나타나지 않으면 수백억 원의 예산이 잘린다. 두 장면은 전혀 다른 종류의 행정처럼 보인다. 하나는 진흙과 땀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회의실과 숫자의 문제다.
그러나 정말 다른 일일까? 오히려 이 둘은 한 가지 질문을 공유한다.
공공기관의 책임은 무엇으로 측정되어야 하는가. 현장에 보이는 헌신인가, 제도 안에서 약속을 지키는 성실함인가?
이 질문을 제대로 다루지 않으면 우리는 삽을 든 사람만 유능하다고 생각하거나, 반대로 서류를 정확히 처리하는 사람만 책임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재난과 예산은 행정의 서로 다른 얼굴이 아니라, 하나의 국가 역량을 시험하는 두 개의 시험장이다.
재난 현장의 영웅성과 행정의 일상성
수해 복구 현장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몸을 쓰는 사람들이다. 물에 잠긴 냉장고를 밖으로 끌어내고, 도로 위에 쌓인 아스콘과 토사를 치우고, 주민의 집 안으로 들어가 망가진 물건을 옮긴다. 이런 장면은 행정의 목적을 아주 선명하게 만든다. 행정은 결국 사람들의 삶을 다시 작동하게 하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특히 최고 책임자가 현장에 나타나는 일은 상징적으로 중요하다. 주민은 자신이 겪은 피해가 보고서의 한 문장으로 축소되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책임자가 진흙을 밟는 순간, 추상적인 정부가 구체적인 얼굴을 얻는다. 위기 때 이런 가시성은 신뢰를 회복하는 데 큰 힘이 된다.
하지만 가시성은 책임의 전부가 아니다. 현장에 나타나는 행동은 신뢰의 문을 여는 행위일 수 있지만, 문을 연 뒤 실제로 필요한 자원을 배분하고 복구 계획을 지속하며 재발을 막는 일은 훨씬 덜 극적이다. 카메라가 떠난 뒤에도 이어지는 배수로 정비, 보상 절차, 예산 조정, 공사 감독, 위험 지역 관리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 행정의 첫 번째 착시가 생긴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노동을 높이 평가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조정과 심의를 과소평가한다. 그러나 재난 복구에서 삽 한 자루의 가치가 발휘되려면 누군가는 그 삽이 필요한 곳을 판단하고, 장비와 인력을 보내고, 예산을 마련하고, 작업 결과를 확인해야 한다.
현장 방문은 책임의 증거가 아니라 책임을 시작하는 신호다.
이 구분은 냉정하지만 중요하다. 현장에 가는 일은 필요하다. 다만 현장에 갔다는 사실이 그 자체로 행정이 작동했다는 뜻은 아니다. 행정의 진짜 실력은 감동적인 장면을 얼마나 오래 지속 가능한 결과로 바꾸는가에서 드러난다.
회의실에 오지 않는 사람은 무엇을 멈추게 하는가
예산 심의에 담당 공무원이 불출석해 지방의회가 다음 해 예산을 크게 삭감한 사례는 이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보여준다. 여기서 핵심은 단순히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니다. 예산 심의는 조직이 시민에게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고, 질문에 답하고, 지출의 우선순위를 검증받는 절차다.
담당자가 자리에 없으면 의원들은 세부 사업의 필요성, 산출 근거, 법적 절차, 집행 가능성을 확인할 수 없다. 그 결과 예산은 두 가지 방식으로 위험해진다. 충분히 설명되지 않은 사업이 그대로 통과할 수도 있고, 반대로 필요한 사업이 설명 부족 때문에 함께 잘릴 수도 있다. 불출석은 개인의 근무 태도 문제가 아니라 정보의 단절을 통해 공공서비스 전체의 품질을 떨어뜨리는 행위가 된다.
예산은 숫자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미래의 행동을 미리 약속하는 문서다. 도로 보수 예산은 앞으로 어느 도로를 고칠 것이라는 약속이고, 복지 예산은 어느 시민을 어떻게 지원할 것이라는 약속이다. 이 약속이 의회의 질문 앞에서 설명되지 못하면, 숫자는 신뢰를 잃는다.
수백억 원의 삭감은 그래서 단순한 징계가 아니다. 의회가 행정부에 보내는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당신들이 공적 자원을 요구하면서 그 필요성을 설명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요구를 신뢰할 수 없다. 예산을 둘러싼 권력 관계의 핵심은 돈을 누가 갖느냐가 아니라, 돈을 요구하는 쪽이 책임 있게 설명할 의무를 지느냐에 있다.
이 장면을 재난 현장과 연결하면 의미가 더 분명해진다. 재난 때에는 모든 사람이 신속한 지원을 원한다. 하지만 신속함이 정당성을 대신할 수는 없다. 긴급 복구를 위해 절차를 간소화할 수는 있어도, 설명과 기록과 사후 검증을 없애서는 안 된다. 오늘의 예외적 지출이 내일의 상시적 낭비가 되지 않으려면, 누군가는 예산의 목적과 결과를 끝까지 설명해야 한다.
행정 책임의 세 층위
행정 책임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방법은 책임을 세 층위로 나누는 것이다.
첫째는 현장 책임이다. 지금 당장 고통받는 사람 곁에 가고, 장애물을 제거하고, 필요한 조치를 실행하는 능력이다. 수해 복구 현장에서 주민의 집과 도로를 직접 회복시키는 일이 여기에 해당한다. 현장 책임이 없으면 행정은 시민의 현실과 분리된 관료적 시스템이 된다.
둘째는 설명 책임이다. 무엇을 왜 하는지, 얼마나 필요한지, 다른 선택지는 무엇인지 말할 수 있는 능력이다. 예산 심의에 출석해 질문에 답하는 행위가 대표적이다. 설명 책임이 없으면 행정은 선의를 내세우면서도 검증을 피하는 조직이 된다.
셋째는 결과 책임이다. 약속한 조치가 실제로 효과를 냈는지, 실패했다면 무엇을 고칠지 확인하는 능력이다. 복구한 도로가 다음 폭우에도 안전한지, 지원금이 적절하게 전달됐는지, 같은 피해가 반복되지 않는지를 살피는 일이다.
세 층위는 서로 대체할 수 없다. 현장에 열심히 갔다고 해서 예산 설명이 면제되지 않는다. 의회에서 논리적으로 설명했다고 해서 주민의 고통을 외면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계획을 잘 세웠다고 해서 결과를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것도 아니다.
이를 간단한 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행정 신뢰 = 현장 대응 × 설명 가능성 × 결과 검증
곱셈으로 표현한 이유는 어느 하나가 0이 되면 전체 신뢰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현장 대응이 0이면 탁상행정이 되고, 설명 가능성이 0이면 독단이 되며, 결과 검증이 0이면 보여주기식 행사가 된다. 세 요소가 모두 일정 수준 이상 작동해야 시민은 공공기관을 믿을 수 있다.
왜 우리는 보이는 책임에만 끌리는가
인간은 눈앞의 장면에 강하게 반응한다. 젖은 옷, 진흙 묻은 장화, 무거운 냉장고를 옮기는 손은 즉각적인 공감과 신뢰를 만든다. 반면 예산 항목의 근거를 확인하고, 회의 자료를 준비하고, 사업별 위험을 비교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지루하다. 성과가 나타나도 누가 그 일을 했는지 잘 보이지 않는다.
이 차이는 정치와 행정의 평가 구조를 왜곡할 수 있다. 보여주기 쉬운 행동은 과대평가되고, 보여주기 어려운 예방과 조정은 과소평가된다. 도로가 무너지기 전에 배수 시설을 점검한 사람보다, 사고가 난 뒤 현장에 달려온 사람이 더 많은 박수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사회의 비용은 종종 박수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예방은 조용하고 복구는 시끄럽다. 잘 준비된 예산 심의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부실한 심의는 나중에 사업 지연과 예산 낭비와 주민 피해로 나타난다. 행정의 성숙도는 위기 때 얼마나 용감한가뿐 아니라, 평상시에 위기를 얼마나 덜 만들었는가로 평가해야 한다.
여기서 책임의 가시성 편향이라는 개념을 생각해볼 수 있다. 사람들은 관찰하기 쉬운 노력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관찰하기 어려운 노력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한다. 이 편향을 방치하면 공직자는 실제 문제를 해결하는 일보다 사진이 잘 나오는 행동에 유인될 수 있다.
따라서 시민과 언론과 의회가 물어야 할 질문도 바뀌어야 한다. 누가 현장에 갔는가만 물을 것이 아니라, 누가 복구 우선순위를 정했는가, 어떤 근거로 예산을 배정했는가, 결과는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반대로 누가 회의에 불참했는가만 비난할 것이 아니라, 그 부재로 어떤 사업의 판단이 불가능해졌고 주민에게 어떤 비용이 발생하는지도 밝혀야 한다.
재난 대응과 예산 심의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보기
재난 대응과 예산 심의를 따로 보면 하나는 인간적이고 다른 하나는 행정적이다. 하지만 시스템 관점에서 보면 둘은 연결된 순환 구조다.
먼저 예산은 재난 이전의 선택이다. 어느 지역의 배수 시설을 정비할지, 위험 지도를 갱신할지, 복구 장비를 비축할지 결정한다. 다음으로 현장 대응은 재난 이후의 실행이다. 마지막으로 결과 검증은 다음 예산과 다음 대응 방식을 수정한다. 이 순환이 끊기면 국가는 매번 처음부터 허둥대게 된다.
예를 들어 수해가 발생한 뒤 현장에서 신속하게 복구했지만, 피해 원인에 대한 보고가 부실하고 관련 예산 심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같은 지역은 다음 폭우에 다시 취약해진다. 반대로 예산은 꼼꼼히 편성했지만 현장 지휘가 느리고 주민과 소통하지 못한다면, 계획은 종이 위에 남는다.
좋은 행정은 영웅적 대응을 반복하는 조직이 아니라, 영웅적 대응이 필요하지 않도록 시스템을 개선하는 조직이다. 물론 대형 재난에서는 지도자의 현장 방문과 즉각적 동원이 필요하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그 방문이 예산의 우선순위, 조직 간 협업, 위험 정보 공개, 복구 기준의 개선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예산 삭감도 무조건 나쁜 일은 아니다. 설명되지 않은 사업을 줄이고 불필요한 지출을 통제하는 것은 의회의 중요한 기능이다. 문제는 삭감이 정치적 보복이나 일괄적 처벌로 끝날 때다. 책임을 묻되 필수 서비스의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사업별 영향과 대체 방안을 함께 검토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현장 봉사도 무조건 선한 결과를 보장하지 않는다. 현장에 인력이 몰리면 오히려 동선이 복잡해지고, 전문 장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비전문가가 작업하면 안전사고가 생길 수 있다. 선의가 효과가 되려면 지휘 체계와 전문성, 기록과 사후 평가가 결합되어야 한다.
시민이 요구해야 할 새로운 기준
그렇다면 시민은 공공기관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가장 유용한 기준은 말과 장면의 감동이 아니라 책임의 연결성이다. 현장 행동이 설명으로 이어지고, 설명이 예산으로 이어지며, 예산이 검증 가능한 결과로 이어지는지를 살펴야 한다.
공공기관은 모든 중요한 사업에 대해 네 가지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는가.
- 왜 지금 이 규모의 자원이 필요한가.
- 실행 과정에서 누가 무엇을 책임지는가.
- 결과가 좋았는지 어떤 자료로 확인할 것인가.
이 네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사업은 현장에서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위험하다. 반대로 처음에는 눈에 띄지 않더라도 이 질문에 충실한 사업은 시간이 지날수록 신뢰를 쌓는다.
공직자에게도 새로운 능력 조합이 필요하다. 현장을 이해하는 감각과 숫자를 설명하는 능력, 긴급하게 결정하는 용기와 절차를 지키는 절제, 주민의 감정을 듣는 태도와 결과를 냉정하게 측정하는 기술이 함께 있어야 한다. 어느 하나만 강한 조직은 쉽게 균형을 잃는다.
Key Takeaways
- 현장 방문을 성과로 착각하지 말고 후속 조치를 확인하라. 방문 뒤에 어떤 예산과 일정과 담당자가 정해졌는지 살펴봐야 한다.
- 예산을 숫자가 아니라 공공의 약속으로 읽어라. 사업의 목적, 근거, 담당자, 평가 기준이 공개되어 있는지 확인하라.
- 설명 책임을 행정의 핵심 업무로 인정하라. 회의 참석과 자료 준비는 부수적인 사무가 아니라 공공자원 사용의 정당성을 만드는 과정이다.
- 예방과 복구를 같은 평가표에 올려라. 재난 뒤의 빠른 대응뿐 아니라 재난 전 위험을 얼마나 줄였는지도 평가해야 한다.
- 책임을 개인의 태도에서 시스템의 연결성으로 확장하라. 한 사람의 성실함이 조직의 기록, 예산, 검증 절차와 이어질 때 비로소 지속 가능한 행정이 된다.
결국 좋은 공공기관은 가장 자주 사진에 등장하는 기관도, 가장 많은 예산을 확보한 기관도 아니다. 위기의 순간에는 신속하게 움직이고, 평상시에는 성실하게 설명하며, 일이 끝난 뒤에는 결과를 공개적으로 검증받는 기관이다.
우리는 흔히 책임자를 찾을 때 누가 현장에 있었는지부터 묻는다. 이제는 질문을 하나 더해야 한다. 그 사람이 떠난 뒤에도 시스템은 계속 작동했는가?
삽을 드는 일과 회의에 출석하는 일은 서로 다른 종류의 헌신처럼 보인다. 하지만 시민의 삶을 실제로 지키는 행정에서는 둘이 하나의 사슬을 이룬다. 현장은 책임을 보이게 만들고, 예산 심의는 책임을 설명하게 만들며, 결과 검증은 책임을 지속하게 만든다. 어느 한 고리가 끊어지면 영웅적인 장면은 남아도 신뢰할 수 있는 국가는 남지 않는다.
Sour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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