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억 삭감과 괴물 폭우가 묻는 것: 지방정부는 미래를 예산에 담을 수 있는가
Hatched by a010장인영
Aug 31, 2026
8 min read
1 views
86%
어떤 재난은 하늘에서 시작되지만, 피해의 크기는 그보다 훨씬 전에 결정된다. 폭우가 내리기 전 배수로를 점검했는지, 대피 안내가 작동했는지, 취약한 주민의 명단을 알고 있었는지에 따라 같은 비가 재난이 되기도 하고 불편한 하루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예방을 위한 예산은 대개 가장 먼저 의심받는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위험에 돈을 쓰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미 발생한 피해를 복구하는 비용은 누구에게나 명확해 보인다. 무너진 도로, 침수된 주택, 멈춘 시장은 눈에 보인다. 예방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경남 하동에서 일반회계의 약 5퍼센트에 해당하는 301억 원, 133개 단위 사업의 예산이 삭감된 일과, 산청을 덮친 괴물 폭우 뒤에 사전 조치가 적절했는지를 묻는 질문은 겉으로는 서로 다른 사건처럼 보인다. 하나는 의회와 집행부 사이의 예산 충돌이고, 다른 하나는 재난 대응의 적절성에 대한 검증이다. 그러나 두 사건은 지방자치의 가장 어려운 질문 하나로 수렴한다.
아직 발생하지 않은 위험을 위해 지금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지방정부는 평소에는 예산을 두고 싸우고, 재난이 닥치면 책임을 두고 싸운다. 문제는 갈등 자체가 아니다. 갈등을 통해 더 나은 선택을 만들어낼 절차와 기준이 없다는 데 있다.
보이지 않는 예방과 보이는 낭비의 싸움
하동군의 301억 원 삭감에는 고령자 복지주택 53억 원, 하동공설시장 재개발 30억 원이 전액 삭감된 항목으로 포함됐다. 건설과, 건축과, 관광진흥과 관련 사업도 큰 폭으로 조정됐다. 집행부는 군민 생활과 지역경제에 직접적인 타격을 우려했고, 의회는 사업의 시급성과 실효성, 절차 이행, 소통 부족을 문제 삼았다.
이 대립에서 어느 한쪽의 언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예산을 집행하는 쪽은 “필요한 사업이니 추진해야 한다”고 말하기 쉽다. 그러나 필요하다는 말은 검증이 아니다. 반대로 예산을 심사하는 쪽은 “성과가 부족하니 삭감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성과가 아직 나타나지 않은 사업과 성과를 낼 가능성이 없는 사업을 구분해야 한다.
특히 복지주택, 시장 재개발, 재난 예방 시설 같은 사업은 단순한 소비가 아니다. 그것은 미래의 위험을 줄이는 사회적 보험에 가깝다. 다만 보험에는 불편한 특징이 있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으면 가입자가 낸 돈이 낭비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사고가 발생한 뒤에야 보험의 가치를 깨닫는다면, 이미 가장 비싼 방식으로 대가를 치른 셈이다.
산청의 폭우를 둘러싸고 “사전 조치가 적절했나”라는 질문이 제기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전 조치는 결과가 나쁘지 않았을 때 거의 기록되지 않는다. 아무도 물이 넘치지 않은 하천을 보며 “누군가 몇 달 전 위험을 줄였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피해가 발생하면, 그동안 보이지 않던 준비의 공백이 한꺼번에 드러난다.
예방 정책은 성공할수록 사건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민주주의에서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공공투자가 된다.
이것은 예산 편성의 구조적 역설이다. 정치인은 눈에 보이는 성과를 원하고, 시민은 체감할 수 있는 변화를 원한다. 하지만 예방의 성과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선거와 언론과 행정평가가 모두 사건과 개통식과 준공식에 더 민감하다면, 예방은 구조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다.
예산 삭감은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문제다
301억 원이라는 숫자는 크다. 그러나 숫자만으로 삭감의 타당성을 판정할 수는 없다. 핵심은 그 돈이 어떤 시간을 사는가에 있다.
고령자 복지주택 예산은 주거 공간만 사는 것이 아니다. 고령자가 고립될 가능성을 줄이고, 돌봄 부담을 낮추며, 응급 상황에서 대응할 시간을 확보하는 투자일 수 있다. 공설시장 재개발 역시 건물의 외관을 바꾸는 사업에 그치지 않는다. 상인의 생계, 지역의 유동 인구, 공동체의 접점을 유지하는 장치일 수 있다.
반대로 이런 사업들이 충분한 수요조사 없이 추진되거나, 토지와 운영비 계획이 불확실하거나, 완공 뒤 관리 주체가 정해지지 않았다면 예산이 크다는 사실과 별개로 재검토되어야 한다. 미래를 위한 투자라는 명분은 부실한 기획을 면책해주는 말이 아니다.
여기서 지방의회가 해야 할 일은 단순한 삭감이 아니다. 사업을 살릴지 죽일지의 이분법을 넘어, 사업이 어떤 조건에서 계속될 수 있는지를 설계해야 한다. 예를 들어 전액 삭감 대신 단계별 집행, 독립적인 수요 검증, 분기별 공개 지표, 일정 기준 미달 시 자동 재심사를 요구할 수 있다.
이 방식은 집행부에도 유리하다. “의회가 발목을 잡는다”는 정치적 구호보다, “어떤 조건을 충족하면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다”는 규칙이 훨씬 생산적이기 때문이다. 의회 역시 단순히 반대하는 기관이 아니라 위험을 통제하면서 공약과 정책을 현실화하는 기관으로 기능할 수 있다.
예산을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세 종류의 비용이 보인다.
첫째는 지금 지불하는 비용이다. 사업비, 설계비, 인건비처럼 현재 예산서에 적힌 금액이다.
둘째는 미루면서 커지는 비용이다. 노후 시설을 고치지 않아 나중에 복구비가 증가하거나, 고령자의 주거 불안이 돌봄과 의료비 부담으로 전환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셋째는 실패했을 때의 비용이다. 효과 없는 사업에 계속 돈을 투입하거나, 정치적 갈등 때문에 필요한 사업까지 멈추는 비용이다.
좋은 예산 심사는 첫째 비용만 계산하지 않는다. 둘째와 셋째까지 비교한다. 반대로 나쁜 예산 정치는 현재 지출만 강조하거나, 미래의 손실을 막연한 공포로만 포장한다.
재난은 행정의 연결부를 시험한다
폭우가 내릴 때 군청의 어느 한 부서만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기상 정보가 전달되어야 하고, 하천과 배수 시설의 상태를 파악해야 하며, 읍면 단위의 현장 조직이 주민에게 안내해야 한다. 도로 통제와 대피, 취약계층 보호, 복구 장비 확보가 서로 연결되어야 한다.
따라서 재난 대응의 성패를 사후의 한 장면만으로 판단하기는 어렵다. “왜 더 빨리 대피시키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은 중요하지만, 그 답을 찾으려면 그 전에 어떤 정보가 있었고, 누가 어떤 권한을 갖고 있었으며, 어떤 기준이 발령을 촉발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예산도 마찬가지다. 건설과 예산, 복지주택, 시장 재개발, 재난 예방은 서로 분리된 항목처럼 보이지만 주민의 삶에서는 하나의 시스템이다. 복지주택이 지연되면 취약한 고령자가 위험한 주거에 남을 수 있다. 시장 재개발이 표류하면 지역 상권이 약해질 수 있다. 지역 건설 경기가 위축되면 관련 업체와 노동자의 소득이 줄어들 수 있다. 행정의 한 칸에서 일어난 결정이 다른 칸의 위험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것을 위험의 전이라고 부를 수 있다. 어떤 위험을 해결하지 않고 예산을 줄이면 위험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장소와 다른 시점으로 옮겨간다. 오늘의 예산 절감이 내일의 복구비가 될 수 있고, 올해의 정치적 승리가 다음 선거의 행정 실패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산 심사에는 “이 사업을 하지 않으면 어떤 위험이 어디로 이동하는가”라는 질문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이 질문은 사업의 찬반보다 더 어렵지만, 훨씬 정확하다.
예컨대 사업을 삭감할 때 다음과 같은 표를 공개할 수 있다.
| 판단 항목 | 확인할 질문 |
|---|---|
| 즉각성 | 지금 하지 않으면 1년 안에 어떤 문제가 생기는가 |
| 대체 가능성 | 같은 목표를 더 적은 비용으로 달성할 방법이 있는가 |
| 실패 비용 | 사업이 실패했을 때 손실은 무엇인가 |
| 지연 비용 | 사업을 미룰 때 추가로 발생하는 비용은 무엇인가 |
| 회복 가능성 | 중단 후 다시 시작하기 쉬운가 |
| 취약계층 영향 | 고령자, 저소득층, 소상공인에게 영향이 집중되는가 |
이런 기준은 갈등을 없애지 않는다. 대신 갈등을 주장 대 주장, 사람 대 사람의 싸움에서 비교 가능한 판단의 문제로 바꾼다.
강 대 강의 정치가 놓치는 것
하동의 갈등 배경에는 보건의료원 건립 논란, 성과 시상금 조례를 둘러싼 소송, 군수에 대한 의혹 제기와 맞고소 등 여러 정치적 충돌이 겹쳐 있다. 이런 환경에서는 개별 예산안이 사업성만으로 평가되기 어렵다. 상대 진영이 제안했다는 이유로 의심받고, 이전 갈등의 기억이 새로운 안건의 판단에 영향을 준다.
이때 예산은 정책 수단이 아니라 정치적 신뢰의 대리전이 된다. 집행부는 삭감을 행정 마비로 해석하고, 의회는 집행부의 사업 추진을 독주로 해석한다. 군민은 어느 사업이 정말 필요한지보다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지부터 듣게 된다.
정치적 책임을 묻는 일은 필요하다. 의회는 집행부를 감시해야 하고, 집행부는 의회의 심사를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정책 판단이 인물 간 불신에 종속되면, 주민은 두 가지 손실을 동시에 떠안는다. 필요한 사업은 지연되고, 불필요한 사업은 정치적 충성심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은 신뢰를 믿음으로 요구하지 않고 검증 가능한 구조로 대체하는 것이다. 상대를 믿으라는 말은 갈등 상황에서 거의 작동하지 않는다. 대신 다음과 같은 장치를 만들 수 있다.
- 사업별 목표와 실패 기준을 사전에 공개한다.
- 일정 금액 이상의 사업은 수요조사와 운영계획을 의무화한다.
- 예산을 한 번에 확정하지 않고 단계별로 배분한다.
- 집행률뿐 아니라 주민 이용률, 유지관리 비용, 취약계층 접근성을 함께 평가한다.
- 재난 관련 시설과 복지사업은 삭감 시 대체 수단과 위험 증가분을 함께 공개한다.
- 의회와 집행부의 협의 과정을 회의록과 자료로 남긴다.
이 장치들은 정치인을 선하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다. 선한 사람만이 올바르게 행동할 것이라는 기대는 제도 설계가 아니다. 이해관계가 충돌해도 최소한의 합리성이 작동하도록 만드는 것이 제도의 역할이다.
지방정부를 위한 새로운 예산 언어
지방정부의 예산 설명은 흔히 “얼마를 투입하고 무엇을 완공하는가”에 머문다. 그러나 주민이 정말 알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다. 이 돈이 우리의 어떤 위험을 줄이는가. 실패하면 누가 손해를 보는가. 다른 선택보다 왜 이것이 나은가. 그리고 상황이 바뀌면 언제 멈출 것인가.
이를 위해 예산을 네 개의 언어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효과의 언어다. 몇 명이 이용하는지,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말해야 한다.
둘째, 위험의 언어다. 사업을 하지 않을 경우 어떤 피해가 예상되는지 설명해야 한다.
셋째, 선택의 언어다. 같은 돈으로 가능한 다른 사업과 비교해야 한다.
넷째, 철회의 언어다. 실패를 인정하고 중단하거나 수정할 조건을 공개해야 한다.
마지막 언어가 특히 중요하다. 행정은 일단 시작한 사업을 멈추기 어려워한다. 이미 투입한 돈과 정치적 체면 때문에 계속 밀어붙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중단 기준이 없는 사업은 성공을 향해 가는 사업이 아니라 관성에 끌려가는 사업이다.
산청의 폭우 같은 사건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사전 조치가 적절했는지 검증하려면 결과가 나빴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조치를 실패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피해가 컸다는 이유로 “어쩔 수 없는 자연재해”라고만 말해서도 안 된다. 당시 이용 가능한 정보, 의사결정 시점, 시설의 상태, 안내의 도달률, 취약 주민 보호 여부를 분리해 평가해야 한다.
이것이 사후 비난과 사후 학습의 차이다. 비난은 책임질 사람을 찾고 끝난다. 학습은 다음번에 같은 위험이 반복되지 않도록 기준과 예산과 권한을 바꾼다. 지방자치가 성숙한다는 것은 실수가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라, 실수가 제도 개선으로 전환된다는 뜻에 가깝다.
Key Takeaways
-
예산을 찬반이 아니라 위험의 이동으로 평가하라. 삭감으로 돈이 줄어드는 것만 보지 말고, 그 결정이 어떤 위험을 미래와 다른 부서와 취약계층으로 옮기는지 확인하라.
-
전액 삭감과 무조건 집행 사이에 단계별 집행을 설계하라. 수요조사, 설계, 시범운영, 본사업을 나누고 각 단계마다 공개된 통과 기준을 두면 정치적 충돌을 줄일 수 있다.
-
예방의 성과를 기록하라. 발생하지 않은 침수, 줄어든 대피 시간, 개선된 취약계층 접근성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성과를 지표로 남겨야 예방 예산이 낭비로 오해받지 않는다.
-
재난 뒤에는 사람보다 연결부를 먼저 조사하라. 정보가 어디에서 막혔는지, 권한이 겹쳤는지, 안내가 주민에게 도달했는지, 장비와 인력이 준비되었는지를 확인하라.
-
모든 사업에 철회 조건을 붙여라. 언제 중단하고, 무엇을 수정하며, 어떤 결과가 나오면 재검토할지 사전에 정하면 실패를 인정할 수 있는 행정이 된다.
지방정부의 진짜 시험은 돈이 많을 때가 아니다. 제한된 자원으로 아직 나타나지 않은 위험과 이미 눈앞에 있는 필요를 동시에 다뤄야 할 때다. 301억 원의 삭감 논쟁과 괴물 폭우 뒤의 사전 조치 검증은 우리에게 같은 사실을 보여준다. 행정의 실패는 종종 예산 부족 자체보다, 시간을 다루는 방식에서 시작된다.
오늘의 지출을 줄이는 결정은 내일의 비용을 키울 수 있다. 오늘의 정치적 승리는 내일의 공동체적 손실이 될 수 있다. 반대로 예방에 쓴 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형태로 가장 완전하게 성공할 수 있다.
그러므로 좋은 지방자치는 “얼마를 삭감했는가”나 “누가 옳았는가”만 묻지 않는다.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피해를 줄이기 위해, 지금 무엇을 측정하고 무엇을 설명하며 무엇을 감수할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지역이라면 예산 삭감도 재난 대응도 단순한 정치적 승패가 아니다. 그것은 더 안전하고 지속 가능한 공동체를 만드는 학습 과정이 된다. 반대로 이 질문을 회피한다면, 예산은 갈등의 무기가 되고 재난은 뒤늦은 책임 공방의 무대가 된다. 미래는 예산서에 저절로 담기지 않는다. 미래를 담으려는 기준과 절차를 가진 사회만이, 아직 오지 않은 위기에 미리 투자할 수 있다.
Sources
Hatch New Ideas with Glasp AI 🐣
Glasp AI allows you to hatch new ideas based on your curated content. Let's curate and create with Glasp AI :)
Start Hatchin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