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축제와 정치의 공통점: 사람들은 늘 책을 고르는 게 아니라 자기 자리를 고른다
Hatched by porcorosso
Jul 18,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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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아니라 자리의 문제
도서전의 주빈이 바뀌는 일과, 선거에서 어떤 정치가 승리하는 일은 언뜻 보면 전혀 다른 이야기처럼 보인다. 하나는 책과 출판의 축제이고, 다른 하나는 권력과 대중동원의 문제다. 그런데 둘을 깊이 들여다보면 같은 질문이 숨어 있다. 사람들은 왜 어떤 공동체에 끌리는가, 그리고 그 끌림은 무엇을 보상하는가.
우리는 흔히 책축제는 지식의 향유, 정치는 가치의 충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많은 사람에게 책과 정치 모두는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는 장치가 된다. 어떤 부스를 지나며 우리는 무언가를 읽는 동시에, 내가 속하고 싶은 세계를 고른다. 어떤 구호에 표를 던지며 우리는 정책만이 아니라, 내가 속하길 원하는 서열과 감정의 질서를 고른다.
이 점에서 책의 국제성이나 정치의 극우성은 완전히 분리된 영역이 아니다. 둘 다 경계 설정의 기술이다. 누가 중심에 서는가, 누가 초대받는가, 누구의 목소리가 정당한가. 겉으로는 문화와 민주주의의 언어를 쓰지만, 실제로는 공동체 내부의 위계와 소속감을 재배치한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자주 내용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자리에 놓이는지를 소비한다.
하이퍼 능력주의는 왜 포퓰리즘과 극우를 부른다
오늘날 가장 강력한 정치 감정 중 하나는 분노가 아니라 불안이다. 누군가는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기대, 누군가는 떨어질지 모른다는 공포가 동시에 커질수록, 사회는 능력의 언어에 더 집착한다. 문제는 이 능력의 언어가 중립적 평가가 아니라, 종종 상승 욕망과 탈락 공포를 동시에 자극하는 심리 장치로 작동한다는 데 있다.
여기서 하이퍼 능력주의는 매우 편리하다. 위에서는 부당한 수단으로 올라간 위선적 엘리트를 지목한다. 아래에서는 능력이 부족한 이들의 기대를 제한한다. 즉, 위로는 배척할 적을 만들고, 아래로는 복종의 규칙을 만든다. 이 구조는 포퓰리즘과 극우가 서로를 활용하기에 너무나 좋은 토양이 된다.
포퓰리즘이 제공하는 것은 단순하다. “당신은 억울하게 밀려났다”는 감정적 복권이다. 극우가 제공하는 것도 단순하다. “당신은 밀려나지 않으려면 다른 사람보다 낫다는 증거를 가져야 한다”는 위계의 확정이다. 둘은 모순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같은 욕망을 다른 방향으로 풀어준다. 상승의 권리와 탈락의 공포를 함께 팔기 때문이다.
이 정치의 핵심은 이념의 순수성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 보존의 정서다. 사람들은 어떤 세계관이 옳아서가 아니라, 그 세계관이 내 위치를 지켜주기 때문에 동원된다. 이것이 위험한 이유는, 공동체의 미래를 묻는 대신 개인의 서열 불안을 해결하는 정치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열 불안은 언제나 더 강한 적과 더 좁은 문을 원한다.
책축제는 왜 이 정치와 닮았는가
책축제는 대개 개방과 교류의 장으로 이해된다. 다른 나라의 주빈을 초청하고, 새로운 번역과 저자를 소개하며, 다양한 독자가 오가는 장면은 그 자체로 선의의 국제주의처럼 보인다. 하지만 축제는 언제나 선택의 정치이기도 하다. 어떤 나라를 주빈으로 세우는지, 어떤 언어가 중앙무대에 오르는지, 어떤 담론이 중심이 되는지는 단순한 기획 문제가 아니다.
주빈이라는 형식은 상징적으로 말하면, 일종의 문학적 외교다. 그러나 외교가 늘 그렇듯, 여기에도 보이지 않는 위계가 있다. 초대받는 쪽은 환대받는 동시에 대표를 요구받는다. 하나의 나라, 하나의 문화, 하나의 정체성으로 압축되어 전시된다. 관객은 그 나라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큐레이션된 이미지와 접속한다.
이 지점에서 책축제와 능력주의 정치의 닮음이 드러난다. 둘 다 사람들에게 말한다. “당신은 여기에서 특별한 무언가를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그 특별함은 완전히 자유로운 다양성이 아니라, 누가 중앙에 놓일지 결정한 뒤 배치된 질서다. 축제의 무대가 커질수록, 그 무대 밖에서 사라지는 목소리도 생긴다.
예를 들어, 어떤 책축제에서 특정 국가가 주빈이 되면 독자들은 그 나라의 현재를 배운다고 느낀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나라가 스스로 말하고 싶은 현재와, 행사 측이 보여주고 싶은 현재가 합성된다. 정치에서도 비슷하다. 유권자는 자신의 불안을 해소할 대표를 고른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그 불안을 유지하고 증폭시키는 언어의 무대를 선택한다. 초대와 선택은 언제나 동시에 배제와 규율을 포함한다.
우리는 왜 자꾸 의미보다 배치를 믿는가
현대 사회는 정보 과잉이 아니라 배치 과잉의 사회다. 사람들은 무엇이 진실인가보다, 무엇이 중앙에 놓였는가에 더 빨리 반응한다. 베스트셀러 목록, 알고리즘 추천, 뉴스 헤드라인, 정치 슬로건 모두 같은 원리로 움직인다. 복잡한 세계를 이해하는 대신, 우리는 우선 무엇이 중요해 보이도록 배열되었는지 본다.
이때 가장 강력한 메시지는 단순한 설명이 아니라 자기 위치를 선명하게 만들어주는 신호다. “공정과 상식” 같은 슬로건이 강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것은 정책의 세부를 제공하지 않아도 된다. 대신 네가 어디에 서 있는지, 누가 부당한지, 누가 밀려나야 하는지를 즉시 알려준다. 책축제에서도 비슷하다. “올해의 주빈”, “이 달의 작가”, “가장 뜨는 출판사” 같은 표지판은 내용보다 먼저 위치를 만든다.
사람은 의미보다 먼저 자리를 배운다. 그리고 자리를 배운 뒤에야 의미를 그 자리에 맞춰 해석한다.
이 통찰은 특히 위험하다. 왜냐하면 잘 꾸며진 배치는 비판을 마비시키기 때문이다. 어떤 정치가가 실제로 무엇을 하느냐보다, 그가 내 불안을 어떻게 정리해주느냐가 더 중요해진다. 어떤 문화행사가 얼마나 다양성을 실현하느냐보다, 내가 그 안에서 어떤 세계시민처럼 느껴지느냐가 더 중요해진다. 그렇게 사람들은 내용보다 감각의 설계에 설득된다.
그렇다면 문제는 단지 선전이나 이벤트의 기술이 아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현대인은 자신의 삶을 하나의 항목으로 요약해줄 분류 체계를 원한다는 데 있다. 내가 승자냐, 패자냐. 중심이냐, 주변이냐. 능력자냐, 낙오자냐. 초청자냐, 초청받는 자냐. 이 질문이 강해질수록 우리는 더 쉽게 배치를 믿는다.
진짜 공정은 서열을 더 잘 세우는 일이 아니다
하이퍼 능력주의와 극우 포퓰리즘의 결합이 위험한 이유는, 그것이 공정을 말하면서도 사실은 지위 경쟁을 윤리로 포장하기 때문이다. 공정은 원래 공동체가 경쟁을 얼마나 정당하게 조직할 것인가를 묻는 개념이어야 한다. 그런데 실제 정치에서는 공정이 종종 “누가 위로 올라갈 자격이 있는가”를 가르는 도구가 된다.
이때 공정은 더 이상 관계의 질서를 설계하지 않는다. 대신 사람들을 서로 비교하게 만든다. 비교는 빠르고 강력하다. 그러나 비교만 남으면 연대는 사라진다. 나는 네 처지를 이해하기보다, 네가 나보다 낫거나 못하다는 증거를 찾게 된다. 그렇게 공동체는 상대를 바꾸는 힘을 잃고, 상대를 서열화하는 능력만 키운다.
이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보면, 책축제도 같은 유혹을 갖는다. 화려한 국제행사와 유명 작가 초청이 늘어날수록, 우리는 “얼마나 큰 축제인가”를 먼저 묻는다. 하지만 더 중요한 질문은 따로 있다. 이 축제가 누구의 독서를 넓히고, 누구의 언어를 보존하며, 누구의 주변성을 줄이는가. 규모는 쉽게 측정되지만, 민주성은 쉽게 측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진짜 공정은 서열을 더 정교하게 세우는 일이 아니다. 서열이 삶 전체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장치를 만드는 일이다. 교육, 노동, 문화, 정치가 모두 하나의 승패 게임으로 환원될 때, 사람들은 불안에 중독된다. 반대로 어떤 영역에서는 비교가 아니라 접근권이 중요하다는 합의를 만들면, 공정은 희소한 우승 자리를 두고 싸우는 논리가 아니라 함께 살아갈 조건을 만드는 논리가 된다.
우리가 바꿔야 할 것은 사람보다 무대다
이제 핵심은 분명해진다. 문제는 특정 인물이나 특정 행사 하나가 아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반복해서 자기 자리를 확인하도록 설계된 무대다. 정치는 불안을 동원하는 무대를 만들고, 문화 행사는 위계를 세련되게 연출하는 무대를 만든다. 둘의 언어는 다르지만, 작동 방식은 닮아 있다.
그렇다면 해법도 인물 교체나 구호 교체에 그쳐서는 안 된다. 무대 자체를 다시 설계해야 한다. 정치에서는 승자와 패자의 감정만 부추기는 프레임을 줄이고, 삶의 안전망과 이동 경로를 넓혀야 한다. 문화에서는 중심국과 주변국의 단순한 전시가 아니라, 서로의 독서 관습과 언어적 조건을 실제로 번역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즉, 누가 보이느냐가 아니라 누가 이해 가능해지느냐를 물어야 한다.
이 차이는 중요하다. 보이는 것은 행사로 만들 수 있지만, 이해 가능해지는 것은 관계를 바꿔야 가능하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한 번의 선거에서 누가 이겼는지보다, 패배한 사람들이 다음 삶을 계속 살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승리는 늘 누군가의 탈락 위에 세워지고, 그 탈락의 감정은 다음 선거에서 더 거친 언어로 돌아온다.
우리는 종종 “왜 사람들은 이렇게 쉽게 선동되는가”라고 묻지만, 더 정확한 질문은 따로 있다. 왜 사람들은 자신의 불안을 해소해줄 자리를 그렇게 간절히 원하게 되었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선동은 이름만 바꾸어 계속 돌아온다.
Key Takeaw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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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이라는 말은 서열화의 도구로도, 안전망의 원리로도 쓰일 수 있다. 진짜 공정은 누가 위로 올라갈 자격이 있느냐보다, 누가 밀려나도 삶을 유지할 수 있느냐를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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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과 극우는 서로 반대가 아니라 결합 가능하다. 하나는 억울함을, 다른 하나는 위계를 제공하며, 둘 다 상승 욕망과 탈락 공포를 먹고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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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행사도 정치와 같은 방식으로 위계를 만든다. 주빈, 중심무대, 초청 작가 같은 형식은 환대이면서 동시에 배치의 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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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내용보다 자리에 먼저 반응한다. 어떤 메시지가 강한 이유는 그것이 진실이라서만이 아니라,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빠르게 알려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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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를 바꾸지 않으면 사람만 바꾸어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개인의 태도 교정보다 중요한 것은, 불안과 서열 경쟁을 반복 생산하는 구조를 수정하는 일이다.
결론: 우리는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자리를 연습한다
책축제든 선거든, 사람들은 결국 자신이 속할 세계를 시험한다. 문제는 그 세계가 종종 내용이 아니라 배치로만 제공된다는 점이다. 누가 앞에 서는지, 누가 초대되는지, 누가 밀려나는지가 곧 질서가 된다. 그리고 그 질서를 공정과 상식, 문화 교류, 상생 같은 말로 포장하면 우리는 더 쉽게 안심한다.
하지만 진짜 질문은 여기에 있다. 내가 이 자리에 서기 위해 다른 누군가를 아래로 밀어야만 하는가. 이 질문을 피하는 사회는 결국 책도 정치도 소비재로 바꿔버린다. 반대로 이 질문을 끝까지 붙드는 사회는, 축제를 통해서는 타자를 이해하고 정치를 통해서는 서로의 삶을 지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무대에 서게 될 것이다. 다만 그 무대에서 무엇을 볼지보다, 그 무대가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소진시키는지부터 물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책과 정치, 문화와 권력은 같은 문장 속에서 하나의 진실을 드러낸다. 공동체의 수준은 가장 큰 목소리가 아니라, 가장 불안한 사람에게 어떤 자리를 주는가로 드러난다.
Sour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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