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시대에 인간을 지키는 기술은 지식이 아니라 행위주체성이다
Hatched by goodteacher1
May 18,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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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더 잘하는 시대, 왜 인간은 더 약해지는가
인공지능이 글을 쓰고, 그림을 만들고, 질문에 답하는 시대에 가장 위험한 것은 지식의 부족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무엇을 선택하고, 왜 선택하며, 누구와 함께 세계를 바꾸는지 감각을 잃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AI 시대의 핵심 경쟁력을 더 빠른 학습, 더 많은 정보, 더 정교한 도구 사용에서 찾지만, 진짜 쟁점은 그보다 깊다. 인간은 이제 무엇을 더 잘 알아야 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인간답게 판단하고 관계 맺고 책임질 것인가를 다시 배워야 한다.
이 질문은 인문학과 교육을 한 자리에 부른다. 인문학은 원래 사람을 연구하는 학문이고, 인간 존재와 삶의 방법을 사유하는 일이다. 교육은 원래 사람을 키우는 일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를 만들어 가는 방식을 돕는 일이어야 한다. 그런데 디지털 기술과 AI가 학습과 창작의 많은 부분을 대신하면서, 우리는 종종 인간을 지식의 저장소나 기능의 집합으로 축소해 버린다. 이 순간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정보가 아니라, 인간의 주체성을 다시 정의하는 일이다.
AI 시대의 핵심 질문은 “무엇을 아는가”가 아니라, “누가 선택하고, 누구와 함께 세계를 구성하는가”이다.
인간은 개인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작동하는 존재다
오랫동안 우리는 주체성을 개인의 내부 능력처럼 이해해 왔다.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결심하고, 실행하는 사람을 좋은 주체로 여겼다. 하지만 실제 인간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사람의 판단은 타인, 환경, 도구, 문화, 기억, 분위기, 습관이 얽힌 장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행위주체성은 혼자서 소유하는 능력이라기보다, 관계 속에서 발현되는 힘에 가깝다.
이 관점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이 학습이다. 어떤 아이가 질문을 던지고, 손에 잡히는 물질을 만지고, 또래와 부딪히며, 교사의 반응을 살피는 과정은 단순한 놀이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선택, 실험, 조정, 협력, 재구성이 있다. 아이는 미리 정답을 알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읽고 다음 행동을 만들어 내는 중이다. 즉, 학습은 머릿속에 지식을 넣는 행위가 아니라 세계와의 접속 방식을 설계하는 일이다.
이 점에서 어린이의 놀이는 매우 중요하다. 놀이는 종종 귀여운 유아기의 부산물로 취급되지만, 사실은 가장 정교한 행위주체성의 실험실이다. 아이는 놀이 속에서 규칙을 만들고 깨고, 사물의 의미를 바꾸고, 공동의 목적을 즉석에서 조직한다. 이것은 단순한 즐거움이 아니라,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몸으로 확인하는 과정이다. AI 시대에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바로 이 능력이다. 정보를 소비하는 능력이 아니라, 의미를 구성하는 능력 말이다.
이 관계적 관점은 인문학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호머, 셰익스피어, 다빈치, 베토벤이 오래 살아남는 이유는 그들이 단지 뛰어난 개인이어서가 아니다. 그들의 작품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어떻게 흔들리고 선택하고 사랑하고 상실하는지를 보여 주는 관계의 지도이기 때문이다. 고전이 지속되는 이유는 답을 주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인간으로서 다시 질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학습의 중심은 지식이 아니라 발현이다
AI 시대에는 교육에 대한 오래된 오해를 버려야 한다. 교육은 빈 상자에 지식을 채우는 과정이 아니다. 학습자는 결핍된 존재가 아니라 이미 세계와 접속해 있는 완전한 존재이며, 지식은 그 가능성을 조직하는 하나의 재료일 뿐이다. 이때 중요한 개념이 발현적 학습이다. 학습은 미리 완성된 경로를 따라가는 직선이 아니라,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예상치 못한 형태로 드러나는 과정이다.
이를 이해하려면 학습을 하나의 생태계로 보면 좋다. 생태계에서는 모든 것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다. 책 한 권, 교사의 질문, 친구의 표정, 방 안의 조명, 디지털 기기, 나무 조각 하나까지도 학습의 조건이 된다. 아이가 어떤 순간에 무엇에 끌리는지는 내부 의지 하나로 설명되지 않는다. 주체성은 고립된 점이 아니라, 연결된 장에서 잠정적으로 떠오르는 패턴이다.
이 관점은 AI와도 맞닿아 있다. AI는 데이터를 연결해 패턴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인간의 학습은 단순한 연결이 아니다. 인간은 연결할 뿐 아니라 의미를 부여하고, 무엇을 연결할지 선택하고, 어떤 연결은 거부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네트워크의 통과자이면서 동시에 네트워크의 편집자다. 학습이란 결국 세계의 수많은 신호 중 무엇을 살리고 무엇을 버릴지 결정하는 능력이다.
예를 들어 보자. 어떤 학생이 역사 수업에서 AI가 요약한 사실을 읽는 것은 쉽다. 하지만 그 학생이 그 사실을 자신의 가족사, 지역의 기억, 현재의 사회문제와 연결하며 “이 사건이 오늘의 나와 무슨 관련이 있지?”라고 묻는 순간, 학습은 달라진다. 이때 학생은 지식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지식을 통해 세계를 재구성하는 사람이다. 이것이 바로 행위주체성의 교육이다.
지식은 외워지는 순간 멈추지만, 행위주체성은 관계 속에서 계속 자란다.
AI 시대의 인문학은 설명하는 학문이 아니라 방향을 주는 학문이다
그렇다면 AI 시대에 인문학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인문학은 더 이상 “사람에 대한 지식”만 제공하는 학문이 아니라, 사람이 기술과 함께 살아갈 때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방향을 제시하는 학문이어야 한다. AI가 사실을 빠르게 정리해 줄수록, 인문학은 사실 너머의 문제를 묻는 일에 더 집중해야 한다.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가, 어떤 관계가 좋은 삶을 만드는가, 누가 배제되고 있는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문학이 기술의 반대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인문학은 기술을 인간의 삶에 다시 접속시키는 작업이다. AI는 매우 효율적이지만, 효율은 목적이 아니다. 목적 없이 효율이 극대화되면 인간은 점점 더 빠르게 움직이지만,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된다. 인문학은 바로 이때 속도를 늦추고 방향을 묻는다. 기술이 무엇을 가능하게 하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소거하는가를 질문하는 힘이 인문학의 역할이다.
이 질문은 교육 현장에서도 중요하다. 교사는 이제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학생이 스스로 주체성을 발현할 수 있도록 환경을 설계하는 사람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교사도 학습공동체 안에서 함께 배우는 존재다. 학생, 교사, 학부모, 또래, 지역사회는 각각 독립된 부품이 아니라 하나의 공동 설계자들이다. 좋은 교육은 혼자 잘 가르치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가능성을 확장시키는 관계에서 생긴다.
이렇게 보면 인문학과 교육은 분리되지 않는다. 둘 다 인간이 자기 삶의 주인으로 남을 수 있도록 돕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주인은 절대적인 통치자가 아니다. 오히려 타인과 세계에 책임 있게 응답하는 사람이다. AI 시대의 인간다움은 모든 것을 통제하는 능력이 아니라, 통제 불가능한 세계 속에서도 의미와 책임을 구성하는 능력에 있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더 똑똑해지는 법이 아니라, 더 함께 사유하는 법이다
행위주체성을 개인의 재능으로만 보면 중요한 것을 놓친다. 누군가가 능동적인 것은 그 사람 안에 원래 에너지가 많아서가 아니라, 그를 둘러싼 환경이 그 능력을 지지했기 때문일 수 있다. 반대로 유능해 보이는 사람도 통제적이고 위계적인 환경에서는 주체성을 잃을 수 있다. 즉, 주체성은 성격이 아니라 조건의 산물이기도 하다.
이 통찰은 매우 실용적이다. 학교에서 학생의 참여가 낮다면 “왜 저 아이는 의욕이 없지?”라고 묻기보다 “이 환경은 아이가 선택하고 실험할 수 있게 설계되었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조직에서도 마찬가지다. 직원의 창의성이 떨어진다고 개인을 탓하기 전에, 의견을 내도 바뀌는 것이 없는 구조인지 점검해야 한다. AI 도입도 같다. 도구가 생겼다고 인간의 창의성이 자동으로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람을 더 수동적으로 만들 수도 있다. 핵심은 도구가 아니라 도구를 둘러싼 관계와 문화다.
여기서 하나의 유용한 틀을 제안할 수 있다. 우리는 주체성을 세 층위로 봐야 한다.
- 개인 행위주체성: 내가 무엇을 목표로 하고 무엇을 선택하는가.
- 공동 행위주체성: 타인과 어떤 관계 속에서 함께 배울 것인가.
- 집단 행위주체성: 공동의 목적을 위해 어떤 사회적 변화에 참여할 것인가.
이 세 층위는 따로 놀지 않는다. 개인의 결심은 관계 속에서 자라고, 관계는 집단적 목적 속에서 방향을 얻는다. 아이가 놀이에서 친구와 규칙을 만들고, 규칙을 바꾸고, 새로운 질서를 시도하는 장면은 이 세 층위가 동시에 작동하는 대표적 사례다. 그 작은 놀이 안에 이미 사회가 들어 있다.
그래서 AI 시대에 좋은 교육은 정답을 빨리 맞히는 훈련보다, 협력적으로 의미를 만드는 훈련이어야 한다. 좋은 인문학 역시 해설을 더 잘하는 일이 아니라, 인간이 서로를 이해하고 세계를 다시 조직하는 방식을 확장하는 일이어야 한다.
Key Takeaways
- 지식보다 주체성이다: AI가 지식 생산을 대체할수록, 인간에게 더 중요한 것은 선택, 책임, 판단의 능력이다.
- 학습은 축적이 아니라 발현이다: 배움은 머릿속에 정보를 쌓는 일이 아니라, 환경과 관계 속에서 새로운 행동이 나타나는 과정이다.
- 놀이를 가볍게 보지 말 것: 놀이는 어린이의 유희가 아니라, 세계와 협상하고 의미를 만들어 가는 가장 정교한 학습 형식이다.
- 주체성은 개인 소유물이 아니다: 좋은 환경, 좋은 관계, 좋은 문화가 있어야 주체성은 자란다.
- 인문학의 역할은 방향 설정이다: AI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보다, 인간이 무엇을 지키고 어떤 삶을 원하는지 묻는 일이 더 중요하다.
결론: 인간다움은 혼자 빛나는 능력이 아니라, 함께 세계를 다시 만드는 힘이다
AI 시대에 인간이 위협받는 이유는 기계가 똑똑해져서가 아니다. 우리가 인간을 너무 좁게 정의하기 때문이다. 인간을 정보 처리 장치로 보면, 더 빠르고 정확한 기계 앞에서 인간은 필연적으로 초라해진다. 그러나 인간을 관계 속에서 의미를 만들고, 타인과 협력하며, 세계를 재구성하는 존재로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인문학은 이 정의를 지키는 가장 오래된 장치다. 교육은 그 정의를 다음 세대로 옮기는 가장 구체적인 실천이다. 그리고 놀이, 협력, 사유, 책임은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인간은 혼자 완성되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 배우며 함께 만들어 가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AI 시대의 핵심 역량은 더 많은 정보를 아는 것이 아니다.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잃지 않으면서도, 타인과 더 넓은 세계를 향해 열려 있는 능력이다. 결국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인간의 생산성보다 인간의 주체성이다. 그리고 그 주체성은 고립된 자아에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생태계 같은 관계 속에서 자란다.
Sour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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